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사카 야스히코 (문단 편집) == [[태평양 전쟁]] 중 == ||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292px-Asakanomiya_yasuhiko.jpg|width=100%]]}}}|| || 1940년대 당시의 야스히코 || 1938년, 아사카는 본토로 돌아와 [[대본영]]에서 근무하게 된다. 그 후 군사 지휘는 맡지 않았다. [[태평양 전쟁]] 말기인 1944년 [[일본]]이 [[필리핀 해 해전]]과 [[사이판 전투]]에서 연이어 패하자, [[제2차 세계대전]]과 삼국동맹을 주장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츠노다 도모시게를 중심으로 하여 아랫동생 [[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]][* 말이 동생이지 아버지 아사히코 친왕이 워낙 늙어서까지도 정력을 자랑했기 때문에, 고작 이 둘의 나이 차이는 2개월밖에 되지 않는다. 동갑이긴 해도 야스히코가 더 일찍 태어났지만 말이다. 더불어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역시 [[메이지 덴노]]의 내친왕이자 노부코의 여동생인 도시코 내친왕과 결혼했기 때문에 야스히코 왕과 나루히코 왕은 형제인 동시에 동서지간이 된다.], 쇼와 덴노의 동생 [[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]], [[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]], 그리고 전 총리 [[고노에 후미마로]]와 함께 [[도조 히데키]] 암살로 시작하여 막 나가는 군부 정권을 엎어버리는 [[쿠데타]]에 참여했다. 하지만 쿠데타의 과격성에 놀란 [[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]]가 실행하기 전에 자수해서 실패했다. 그러나 물증도 딱히 없었고, 완전히 발각된 것도 아니라서 의혹이 있는 정도였기 때문에 쿠데타 참여자 중에서 처벌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. 거기다 책임자가 대충 묻어버린 탓에 [[상부#s-1|상부]]에 알려지지도 않아 쇼와 덴노는 그런 사실도 몰랐으며, 전후에야 밝혀지게 된다[* 참여자들의 이력이 천황의 친동생들부터 친왕에 육군 대장 등 정말로 화려한데다가, 이미 군부 내에서도 도조 히데키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기 때문이다. 나중에 숙청 대상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난리를 쳤으나, "다카히토 전하가 허락하셨으면 넌 죽었어!"라는 츠노다의 비웃음만 받고 끝났다.]. 웃긴 건 저기 쿠데타 암살 명단 중에 '''자신과 [[고노에 후미마로]]도 [[역관광|포함되어 있었다는 것]]'''이다. 물론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친왕은 황족이고 [[고노에 후미마로]]는 유명한 [[후지와라]] 씨족의 후예인 [[고노에]] 가문의 당대 당주라 대놓고 죽이지는 않았겠지만, 만일 진짜 쿠데타가 성공했으면 자신과 고노에 또한 '''100% [[숙청]] 확정'''이다. 오히려 그 덕분에 자기 목이 붙은 셈. 이쯤 되면 [[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]]가 자수한 게 본인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었다. 1945년 일본이 [[오키나와 전투]]에서 패하고 [[미국]]이 [[몰락 작전]]을 계획할 때 또 사고를 친다. 무언가 하니 '''[[결호작전]]'''과 육해군의 통합. 그러나 아사카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고 [[1945년]] [[8월 15일]], 일본은 [[히로시마·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]]와 소련군의 참전으로 더 이상의 항전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. 따라서 쇼와 덴노와 일부 신료들의 결단[* 이중 쇼와 천황이 [[궁성사건]] 등 군부의 완고한 반발을 무릅쓰고 항복을 시인한 것을 일컬어 천황의 성단(聖斷)이라고 한다.]에 따라,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고 일본 제국은 결국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. 야스히코가 이런 개드립을 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이 자가 황도파라는 것이고, 내면적으로는 전후의 전범재판 기소를 우려했기 때문이다. 그런데 항복을 하지 않고 [[미군]]의 인명 피해를 계속 내 미군을 협상의 테이블로 끌고 간다면, 일본은 [[미국]]에게 점령당하지 않고 본인은 죽음을 면한다. 즉, 지 목숨 구하려고 본인 백성들을 마치 전쟁터에 개 몰듯 몰아대서 포화에 갈아넣겠다는 것이라는 심산이었을 것으로서, 사실이라면 그는 그야말로 본인밖에 모르는 치사한 인간이었던 셈이다. 문제는 이랬다고 하더라도 미군 수뇌부가 [[이오지마 전투]]에서 일본군의 결사항전에 의한 막대한 피해를 보고 일본 제국 본토 침공에 대해 망설였다는 것이다. 사실 당시에는 [[제2차 세계 대전]] 당시 금상천황(今上天皇)으로 재위하던 [[쇼와 덴노]] 또한 다른 [[유럽]]의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잘 되어도 폐위되거나, 나아가서는 혹시라도 자국의 군주제가 폐지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불안해했다고 한다. 실제로 [[제2차 세계대전]] 종전 이후 망한 군주제 국가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. [[이탈리아 왕국]]의 경우에는 1943년 [[베니토 무솔리니]]를 몰아내고 연합군으로 전향해 1년 동안 이탈리아 내전을 치른 결과 무솔리니는 죽었음에도 국민투표에 따라 이탈리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되었다.[* 국민투표 결과는 남부지방과 북부지방이 여론이 갈려서 결과가 거진 반반이었다. 북부의 주된 여론이었던 왕실 폐지가 근소한 차이로 결국 이기게 되었지만, 만약 왕실 유지 측이 이겼다면 연합국이 굳이 왕실을 폐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.] 또 [[루마니아 왕국]]은 종전 이전에 [[추축국]]에서 연합군으로 전향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국가 [[소련]]에게 무장해제 당했기 때문에 왕가가 쫓겨나고 [[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|공산주의 정권]]이 들어서게 되었다. 하지만 우려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은 채 쇼와 덴노는 황위를 유지하고 전후에도 재위했으며, 황실도 무사했다.[* 다만 대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서, 덴노를 비롯한 [[일본 황실]]은 평범한 [[입헌군주제]]의 상징적 국가원수로 위상이 비교적 낮아져버렸고, 일본 황실의 직궁가([[다이쇼 덴노]]의 직계후손)를 제외한 세습친왕가와 [[화족]]들도 전원 평민으로 전락했다([[신적강하]]). 이는 직궁가에게 있어서 큰 타격이었는데, 왜냐 하면 당시에도 직궁가는 그러잖아도 남계가 부족해서 세습친왕가인 [[후시미노미야]]와 직궁가를 배출한 [[간인노미야]], 특히 [[후시미노미야]]와 그 분가들로 남자들의 수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. [[가츠라노미야]]와 [[아리스가와노미야]]는 이미 대가 단절된 상태였다.][* 근데 사실 미군정은 전쟁 범죄 의혹이 있는 황족만 강등시키려고 했었다.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대거 강등된 이유는 황실의 큰어른 뻘이지만 이전부터 자신의 황족 신분을 싫어하던 [[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]]이 황족들에게 황적 이탈을 독려했기 때문이다.] 아예 왕정이 폐지된 [[이탈리아]]의 경우에도 연합국이 강제로 폐지시킨 게 아니라 국민투표에 따라 결정된 것이고, 그 결과도 찬반이 거의 반반으로 갈렸기 때문에 '전후 추축국=군주제 폐지'라는 공식은 애초에 맞지 않다. [[태국]]도 추축국이었지만 왕실이 무사했다. 이처럼 전후 추축국 중 군주국의 공화국 전환은 소련 점령 지역이 아닌 이상 연합국의 강제력이 아니라 국민들의 의향이 작용했고, 일본은 황실에 대한 전반적인 여론이 전쟁 중에도 부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[* [[국화와 칼]] 제2장의 내용에 따르면, 미군이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들의 진술서 중 천황을 비방하는 내용이 적힌 것은 단 '''세 통'''에 불과했다고 한다. 일본군은 본인 병사들이 포로로 잡힐 때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. 따라서 이들은 심문 훈련을 받지 않고 자신의 진짜 의견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음에도 이러했다. 심지어는 그 세 통마저도 천황제 폐지를 주장한 건 한 통뿐이었다.] 황실은 그 영향력을 다행히 상당부 지켜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